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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망퉁物語

스마트폰



 이미 그녀의 머릿속은 돼지고기로 할 지 쇠고기로 할지로 꽉 찼다. 쌀국수만 먹고 모자라면 에그롤을 추가하자는 아바마마의 목소리는 뇌를 만지지 않았다. 그저 오다가다 스쳐지나간 것이다. 반드시 월남쌈을 먹고 말리라는 그녀의 결심이 선 후였기 때문이었다. ‘후웁-’ 가게 가득 퍼진 고수의 향을 코 한가득 들이마신 후 점원을 불렀다. “여기 흑돼지인가요?” 점원이 고개를 가로졌기 전부터 위대한 메르망퉁의 왕위 계승 서열 4위에 빛나는 홍점례공주는 알고 있었다. 최상급의 흑돼지를 골짜기 가득 생산해내는 메르망퉁이 아닌 이상 흑돼지는 일반 식당에서 기대하기 힘들다는 사실은 용산참사가 얼마나 애옥한지 보다 더 상식적임을 말이다. 그럼에도 흑돼지인지 물어보는 모습에서 흑돼지에 대한 그녀의 무한애정을 왕은 느낄 수 있었다. “흑돼지가 아닌 이상 쇠고기로 하지. 여기 한우인가?” 왕의 물음에 점원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럼 반반으로요.” 공주는 아바마마의 입에서 쌀국수와 에그롤이 나오기 전에 얼른 주문을 마쳤다. “무슨 양념 반 프라이드 반도 아니고, 돼지고기와 쇠고기 둘 중 하나만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여기는 치킨집이 아닐뿐더러 말이죠.” 그녀의 왕국이었으면 흑염소가 흑돼지보다 검다는 말처럼 어림도 없을 소리였을 테지만, 이곳에서 그녀는 평범한 손님 중 하나일 뿐. 그냥 참기로 한다. “잠시만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그녀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테이블을 지키는 꼴이 점원은 멀뚱멀뚱 서 있을 작정인가 보다. 성가심에 “이따 주문할게요.”라며 그를 쫓아버렸다. 꼭 못난 흑염소같이 생긴 점원은 참고로 이곳에는 절임 무 따윈 없다며 씽긋 웃고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저 놈을 쥐도 새도 모르게 잡아다가 흑돼지와 교배시키자는 어바마마의 노한 마음을 달래면서도 공주는 고민했다. 쇠고기로 할 지 돼지고기로 할 지 말이다.


 다시 한 번 찬찬히 메뉴판을 살펴보기로 했다. 옆에서 연신 담배를 펴대며 욕을 하고 있는 왕의 입에 자스민 차를 흘려 넣어주고, 그녀는 빨간 융이 둘러진 메뉴판을 집어 들었다. 첫 면을 펴자 미국산 육우지만 절대 다리가 휘청거리는 다우너소가 아니라는 주인의 손사래가 떡하니 있었다. 그 밑에 미국의 거농 스티브 잡‘s 팜에서 재배한 사과만을 사료로 키운 소라는 설명이 굵은 글씨로 쓰여 있었다. 그리고는 조금 가격이 높지만 돼지고기는 따라올 수 없는 쇠고기만의 맛과 영양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이 되어 있었다. 각종 채소와 함께 페이퍼에 싸먹을 때 엣지 있어 보인다는 어마마마의 말이 떠오른 공주였다. 또한 감동스러운 육즙과 함께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치감 등 자신이 쇠고기를 먹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적어놓은 시식 평도 그녀를 쇠고기 쪽으로 기울게 했다.


 당장이라도 흑염소 같은 점원을 부를까하다 겨우 참고는 돼지고기 면도 살피기로 했다. 그 사이 왕은 그 연기를 타고 날아가 버릴 정도로 담배를 피워대고 있었다. 미간에 잔뜩 잡힌 주름이 안 그래도 무서운 인상의 왕을 야차와 같이 보이게 했다. 그러나 공주는 왕의 불편한 심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메뉴판에 집중하기로 했다. ‘한 가문의 혼과 집념이 고스란히 담긴 돼지고기’라는 문구와 함께 두 딸의 손을 꼭 잡은 부리부리한 눈매의 농장주인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언제든 구멍가게로 전락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돼지를 키우고 있다.” 메르망퉁을 비롯해서 세계적으로 유명인사가 된 농장주인은 최근에 이런 말을 남겼다는 기사가 함께 게재되어 있었다. 그런데 기억을 떠올려보니 이 농장주인의 낯이 익은 것이 지난 달 돼지 200여 마리를 아들에게 편법증여하다 영업정지를 먹었던 그 노인네였다. 평소 해외토픽 같은 자투리 뉴스를 좋아하는 공주의 기억이 온전하다면 틀림없이 그가 맞았다. 벌써 영업재개를 한 것인가 하며 공주는 고래를 갸우뚱거렸지만, ‘뭐 어때. 어차피 고기 맛만 좋으면 되는 걸’하며 공주는 쓸데없는 생각은 않기로 했다. 고기 표면에 led코팅을 자르르하게 해놓아서 어느 각도에서 보더라도 군침이 파블로프의 개 마냥 흐를 것이라는 농장주의 호언장담은 틀림없는 사실 같았기 때문이다.


겉치레보다는 실속을 차리기로 한 공주였다. 돼지고기로 정한 것이었다. 그런데 점원이 채 부르기도 전에 음식이 도착했다. 쌀국수와 에그롤이었다. 위대한 메르망퉁 왕국 왕위 승계 서열 4위에 빛나는 홍점례공주가 메뉴판 삼매경에 빠져있는 동안 왕이 몰래 시킨 것이었다. 애시 당초 그녀에게 월남쌈은 필요 없는 음식이었다. 아비는 이제 갓 이유식을 뗀 세살바기 공주에게 월남쌈을 시켜줄 마음도 없었다. 그저 아비가 먹는 쌀국수와 에그롤을 덜어주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위장은 차고 넘쳤다.


 스마트폰. 홍차판매원 홍점례양에게 골치 아픈 스마트폰은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였다. 그녀에게는 그저 셀프 카메라 잘 찍히고 mp3가 많이 저장되는, 할부기간이 9개월이나 남아있는 현재 폰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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