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망퉁 왕국의 제지 산업은 예상 외로 낙후되어 있다. 딱히 펄프로 삼을 만한 나무도 없을 뿐더러 그나마 있는 몇 그루도 그 망할 놈의 흑염소가 뿔을 다듬으려 문질러대는 통에 전부 생채기가 생겨버렸다. 대대로 왕국의 역사를 기록했던 문헌이 아직도 파피루스인 이유이다. 출판산업도 파피루스에 일일히 적는 전근대적인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다. 놀라운 것은 변변한 화장지조차도 생산해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왕국의 국민들은 큰 일을 본 후, 화장지를 대신해 비데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사장님! 우리도 비데해요."라 외치지 못하는 열악한 근무환경에 있는 이들이여 부러움에 패배의식에 젖을 것도 아니다. 메르망퉁의 비데는 고래이기 때문이다. 바다에서 노닐던 새끼고래를 잡아다가 거대한 풀장에서 사육한다. 사실 말이 풀장이지 왕국의 공용 화장실이다. 고래가 등에서 뿜어내는 물줄기는 불순물 세척에 그만이다. 덩치에 따라 그 물줄기가 너무 세찰 수 있다는 문제만 제외하면 말이다. 따라서 비데 고래를 잘 골라잡아야 하는데 그게 여간 쉽지 않다. 그냥 복불복이다. 왕국의 위대한 영농후계자이자 마흔이 넘어 빠띠쓰리에 처녀와의 국제결혼을 통해 간신히 노총각 신세를 면한 쉬크문은 지난달 하필이면 고래 중 가장 크다는 범고래에 걸려 성 안뜰까지 날아가는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때마침 벚꽃놀이에 한창이던 홍점례 공주와 그녀의 깜쏘유모에게 아랫도리가 벗겨진 '흉'하고도 '악'소리나는 모습을 보여줘 졸지에 흉악범으로 몰리기도 했다.
이렇듯 메르망퉁의 고래 비데는 불규칙적이고 불안정해 강철 항문을 가진 이가 아닌 대다수의 국민이 고통 받고 있었다. 심지어 세찬 물줄기가 무서워 많은 국민들이 X닦기를 거부했고, 이에 왕국은 온갖 악취와 혼탁해진 공기로 유래없는 악취대란을 겪었다. 결국 범고래에 걸리까봐 X닦기를 거부한 흑돼지가 X독에 올라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에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국민의 목소리가 드높아져만 갔다. 이 때 홀연히 나타나 나선 이가 있으니, 왕국의 큰 스승이자 선인이신 홍부레공이었다. 그로 말할 것 같으면 일찍이 불가마에 귀의해 큰 깨달음을 얻으셨고, 맑고 향기로운 메르망퉁을 건설하고자 힘쓴 이였다. 워낙에 총명하고 박학하신지라 수많은 저서를 남기셨고, 욕심을 부르는 잉여재화를 버리고 최소한의 것으로 삶을 영위하라는 무소유의 가르침을 남기신 왕국의 의인이자 위인이셨다. 오죽하면 같은 선인들 사이에서도 "소유하지 마시라고 하지만 이 한 권의 책만큼은 소유하고 싶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홍부레공은 이미 불가마에 들어가도 수염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맺히고, 얼음방에 들어가다 땀을 팥죽 흐르듯 흘리는 경지에 이르렀기에 그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는 엄청났다. 공은 거처에서 한 발자국도 거동하지 않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끝에 고래 비데의 물 세기를 조절하는 장치를 발명했다. 겸손하신 공이였기에 이 또한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오직 중생을 사랑하는 '불심'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남은 문제는 난폭하기로 소문난 범고래의 구멍에 조절장치를 끼우는 건데, 쥐새끼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를 무서워하듯 누구하나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다. 자칫하면 범고래에 물려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왕을 위시한 각료들의 회의가 열렸다. 한 장관이 어차피 쓸모없는 흑염소를 보내자는 의견을 제시했으나 동물보호단체와 자양강장협회의 격렬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또 한 장관은 이미 전 국민에게 흉악범으로 찍힌 쉬크문을 보내자며 강력히 주장했으나 영농후계자 협회와 인권단체의 반대로 이 또한 무산되었다.
고래의 등에 조절 장치를 다는 이를 선발하는 문제가 이렇듯 난항을 겪을 때, 그 무거운 짐을 지고자 나선 이가 있었으니 바로 홍부레공이었다. 의롭게 나선 공은 혹 목숨을 잃더라도 가진 것이 없으니 잃을 것도 없다며 담담히 고래에게 향했다. 그리고 그 뒷모습이 공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오로지 왕국을 맑고 향기롭게 하고자 범고래와 사투를 벌이시던 공은 조절장치를 달지 못한 채 입적하시고 말았다. 메르망퉁의 전역은 울음바다가 되었고 공의 의로움을 기리는 행사가 기획되었다. 그러나 작고 누추하지만, 공을 닮아, 단아했던 그의 침소에서 그의 유언이 발견되면서 상황은 변했다. "내가 죽더라도 바리식을 하지 말 것이며 몸 속 맥반석 계란을 추릴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말라."는 공의 뜻이 전해지자 온 국민들은 다시금 오열했다. 이때 흘린 눈물이 강을 이뤘고, 생전에 공이 남기셨던 모든 저서가 봄비에 눈 녹듯 녹아버렸다. 파피루스종이가 그만 눈물이 닿자 녹아버린 것이었다. 공의 뜻대로 절판된 것이요, 그를 기리는 이들의 뜻대로 품절된 것이었다. 무소유를 주창하신 공다운 마지막 가시는 길이었다. 그러나 공의 가르침을 아직도 이해못한 우매한 에궁선생은 공의 저서 한 권 없는 자신의 책장을 보며 아쉬운 마음 가실 길 없어 그저 가슴팍만 쥐어짜고 있다.
아직 범고래에 조절장치를 달지는 못했다. 왕국을 맑고 향기롭게 하고자하셨던 공의 고결하신 가르침대로 선뜻 나서 범고래에 조절장치를 달아줄 이는 누구인가? 당신인가? 아니면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인가? 아니면 우리 모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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