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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망퉁物語

낮술 하나, 둘


낮술1


 본디 낮술이라 하면 대학 캠퍼스의 낭만이리라. 흑돼지를 베개 삼아 너른 잔디밭에 누워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수업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 따위는 들리지도 않는다. 메르망퉁 왕위 계승 서열 4위에 빛나는 홍점례공주는 도서관 한가득 케케묵은 책 냄새를 피해 잔디밭으로 나왔다. 오늘과 같이 볕이 좋은 날이면 그녀는 낮술을 한다. 늘 곁을 지키는 친구 본사마와 함께 말이다. 그는 왕국의 ‘신문고’를 관장하는 애로부장관 뵨사마의 손자로 유치원생 시절부터 그녀를 짝사랑했다. 공주는 흑돼지의 등을 갈라 금화 몇 닢을 꺼내 본사마에게 건넸다. 그는 공주의 취향을 정확히 알고 있다. 오늘 같이 바람이 살랑거리는 날이면 해물파전에 흰 순두부탕에 좁쌀막걸리가 제격이다.


 'Color my life with the chaos of trouble.' 신입생이던 3년 전 우연히 들른 인문과학서점의 한 귀퉁이에 누군가 갈겨 쓴 문구다. 공주는 그녀의 앞에 펼쳐질 대학생활이 그와 같이 격정의 나날들이기를 꿈꾸며 행여나 잊을까 손바닥에 고이 적어 왔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격정의 순간은 찾아왔다. 다만 사람을 배우고 인생을 배우고자 했던 그녀가 꿈꾸던 격정이 아니라서 문제이긴 했지만 뭐 인생은 그런 거니까. 그녀가 배우고자 했던 사람과 인생과 학문은 메르망퉁의 왕립대학에는 없었다. 오로지 ‘빽빽이’만이 학업의 전부였다. 대부분의 학생이 영어시험에 나오는 단어 하나를 외우기 위해, 관료시험에 나오는 상식 하나를 외우기 위해 날마다 연습장 한권씩 빽빽하게 색칠을 하고 있었다.


 누구하나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이 없이 눈앞에 놓인 입사를 위해 빽빽이를 하는 현실은 메르망퉁의 국민들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자살율은 매년 높아졌고, 스트레스로 병원을 찾는 사람도 4년 동안 2배 이상 늘었다. 왕국의 위대한 스승이자 정신건강계의 석학인 에궁선생이 빽빽이를 메르망퉁을 좀먹는 원인으로 꼽았을 정도였다. 공주도 예외는 아니었다. 때문에 그녀는 낮술을 하는 것이었다. 왕은 이런 그녀를 두고 쓸데없는 생각이 많아서라며 꾸짖곤 했다. 국토에 건물을 빼곡하게 세우면 국가의 내실도 빼곡하게 채워지는 것이라 믿었던 왕이었기에, 빽빽이는 대학생이라면 응당 해야 할 것이며 대학생의 빈 뇌를 가득 채워주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언덕 너머로 양손 가득 한 짐을 들고 헉헉거리며 바삐 발을 놀리는 본사마가 보인다. 너른 잔디밭에서 나른한 오후 햇살을 맞으며 노른 좁쌀막걸리를 마시면 차가웠던 마음이 노릇노릇 구워질 것이라 믿는 공주였다. 빽빽이로 인해 엄지와 중지에 굳은살이 가득한 손으로 잔을 내미는 본사마에게 술병을 기울이며 공주는 읊조렸다. “마셔라. 낮술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리라. 부어라. 술잔이 박제된 너희 가슴을 다시 뛰게 하리니, 교육이 사육이 되어버린 작금의 사태에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것은 이 순간뿐이어라.” 나지막했지만 본사마는 똑똑히 들었다. 강하게 내리쬐는 햇빛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공주의 얼굴은 한 떨기 들꽃과 같았다.


 “공주님. 장차 이 나라의 왕이 되실 분이 이렇게 허송세월하고 계실 겁니까? 어서 도서관으로 드셔서 빽빽이를 하십시오.” 멀리서 학장이 헐레벌떡 뛰어오며 외쳤다. “어쩌시려 그럽니까. 폐하께서 아시면 제게 불호령이 떨어집니다. 본사마님도 그렇습니다. 공주님을 말리시지는 못할망정 같이 낮술이나 드시다니. 그렇게 넋 놓고 계시다가는 왕국의 어떤 기업에도 간택 받지 못하십니다.” 괘념치 말라는 공주의 손짓을 무시한 채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대는 학장이었다. 이에 화가 난 공주는 학장의 뒤통수를 향해 한 대 날렸다. 그러나 학장은 한 발 앞서 머리를 쏙 집어넣어 감히 그녀의 손을 피했다.

“학장아 학장아 머리를 내밀어라 그렇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

“공주님 공주님 님이라면 내밀겠습니까. 맞을게 불 보듯 뻔한데. 헤헤."

끝까지 자신을 능멸하는 학장에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공주는 그에게 흑돼지가 되는 흑돼지형을 내렸고, 자신의 약속대로 수일 내로 잡아 구워 먹었다. 메르망퉁 왕위 계승 서열 4위에 빛나는 홍점례공주가 흑돼지 목항정살에 빠진 순간이었다.


낮술2

 본디 낮술이라 함은 일용직의 고단함을 달래는 쓰디쓴 약이리라. 술집 여주인의 따가운 눈총을 애인삼아 단무지 한 조각 베어 물고 있노라면 새벽의 기억일랑 그저 그렇고 그런 일이 된다. 메르망퉁의 위대한 영농후계자인 쉬크문은 오늘도 터벅터벅 힘없이 걷는 이의 축 늘어진 어깨를 잡는다. 그가 아는 이던 아니던 개의치 않고 함께 술집으로 들어서서는 함께 술 마시기를 권한다. 난처한 표정으로 호주머니를 뒤적이는 상대의 손을 끄집어내 술잔을 들려주고는 ‘쉬크’하게 웃는다. “어제까지 한 이틀 일 했어요.” 그래도 미안한지 다음을 기약하는 이는 그냥 떠내 보내고, 술잔을 만지작거리는 이에게는 건배를 제안한다.


 쉬크문은 홍차재배가 휴지기로 들어서는 9월에서 이듬해 2월까지면 늘 낮술을 마신다. 빠띠쓰리에에서 메르망퉁까지 시집 온 그의 색시는 마이너스 통장을 흔들며 잔소리를 해대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홀어머니는 이런 그를 두고 젊은 시절의 몹쓸 병이 도져서라며 아예 자리에 드러누웠다. 홀어머니가 그러는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젊은 시절 쉬크문은 홍차재배가 싫어 집을 나온 적이 있었다. 한 평생 홍차잎만 따며 촌구석에서 살고 싶지는 않았다. 관절염에도 그를 붙잡겠다고 뒤쫓는 어미를 뒤로 하고 잰 걸음으로 버스에 올라탔다. 그렇게 수도로 와 이리 저리 전전하다 흘러들어온 곳이 바로 인력시장이었다.


 달빛이 채 가시기도 전 이른 새벽, 하얀 입김을 내뿜는 한 무리의 사내들이 모닥불 곁에 모여 있었다. 거친 입담을 자랑하는 사내와 묵묵히 그의 말을 들어주는 또 한 사내와 그 곁에서 곁불을 쬐고 있는 쉬크문이 그 무리에 있었다. 동이 틀 무렵이 되자 저 멀리 트럭 한 대가 들어왔다. 트럭에서 내린 운전사는 모닥불에 모인 무리의 한 사내와 이야기를 주고받고는 7명의 사내를 태워 떠났다. 간택 받은 자와 간택 받지 못한 자의 희비가 갈리는 순간. 그 후 몇 대의 트럭이 들어왔지만 쉬크문을 태워가는 운전사는 단 한명도 없었다. 할 줄 아는 거라고는 비료주고 농약 치는 일뿐인 쉬크문을 쓸 이가 있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남겨진 이들은 크게 실망하며 집으로 돌아섰고, 쉬크문도 다 타서 불씨마저 꺼진 드럼통을 뒤로 한 채 걷기 시작했다. 그때 축 처진 그의 어깨를 잡는 앙상한 손이 있었다. 아까 묵묵히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점잖은 사내였다.


 “Color my life with the chaos of trouble.” 술에 적잖이 취한 점잖은 사내가 나직이 읊조렸다. 쉬크문은 빈속에 강소주를 들이켜 어지럽긴 했지만 그 말만은 또렷하게 들렸다. “무슨 뜻입니까?” “마셔라. 낮술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리라. 부어라. 술잔이 박제된 우리 가슴을 다시 뛰게 하리니, 고된 하루에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것은 이 순간뿐이어라.” 점잖던 사내는 이 말을 남긴 채 쉬크문의 호주머니에 손을 불쑥 넣고는 술값을 치르고 떠났다. 비틀거리는 그의 등 뒤에 대고 물었다. “저 존함이라도......” “나 같은 하루살이에게 이름이 어디 있나.” 돌아서 빙긋 웃어 보이고는 다시 갈 길을 가는 사내였다.


 쉬크문의 호주머니에는 2만원과 피다만 담배 한 갑이 들어있었다.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한 채 그 길로 고향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그 후 쉬크문은 여느 농사꾼보다 열심히 홍차재배에 매달렸다. 단, 휴지기가 되면 그 점잖은 사내를 찾아 매일 인력시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를 볼 수는 없었다. 대신 그와 같이 고된 하루살이에 메마른 이들이 있었고, 예전에 그가 그랬듯이 쉬크문은 축 처진 어깨가 있노라면 붙잡고 낮술을 사줬다. 일을 구하지 못하고 돌아가는 일용직에게 낮술은 삶의 고단함을 달래줄 쓰디쓴 약이기 때문이다.


덧: 다음 회에는 애로부장관의 손자로서 왕립대학을 나왔지만, 거리의 일용직이 되어버린 본사마의 기구한 사연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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