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기증(마오짱 이야기)
"흑돼지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메르망퉁 왕국은 한파가 몰아닥치자 온통 빙판장으로 변했다. 평소
스케이트, 썰매, 스키 등이 국민스포츠일만큼 빙상을 사랑하는 국민
들이었다. 너나 할 것 없이 빙판으로 나와 겨울을 즐겼다. 이갈이가
한창인 꼬마부터 이가 빠져 음식 섭취도 못하는 노파에 이르기까지
휑하니 빈 앞니를 드러내며 행복에 겹도록 얼음을 지쳤다. 메르망퉁
의 위대한 왕은 올해도 어김없이 '빙신일세(氷身一世)'주간을 선포
한다. 물론 절대 욕은 아니다. 빙판과 몸이 하나되는 세상이란 뜻으
로 메르망퉁의 전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각 마을 대표들이 모여
동계스포츠를 겨루는 큰 규모의 행사이다. 물론 팥이 가득한 비비빅
을 우걱거리며 하는 말이라 알아듣긴 힘들지만 뭐 상관없다.
모두가 행복해하는 빙신일세 주간이지만 단 한 명에게는 예외다. 흑
염소는 이 주간을 생각만해도 발바닥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본디
흑염소라 하면 왕국에서 알아주던 촉망받는 스케이터였다. 흑염소
의 수염이 거뭇거뭇 나기 시작한 주니어 시절, 그녀를 따를 자는 없
었다. 아! 수염. 메르망퉁에서는 수염이 여성성의 상징이다. 아무튼
그녀는 줄곧 최고였고, 앞으로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을 듯 했다. 그
시절에는 2박 3일을 꼬박 스핀을 돌아도 끄덕없을 정도였으니 말이
다. 그녀의 연기에 많은 이들이 찬사를 에누리없이 보냈다. 그런
데 돌연 등장한 흑돼지로 인해 상황은 전부 바뀌었다. 도저히 흑돼
지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피겨연기에 딱 맞는, 소두에 긴 앞뒤 다리,
그리고 그 눈빛 연기는 흑염소가 봐도 일품이었다. 흑염소로 향했던
감탄과 찬사는 모두 흑돼지로 옮겨갔다.
단 한번도 자신에게 향한 관심과 사랑을 나눠가져본 적이 없던 흑염
소였기에 흑돼지의 출연에 적잖이 당황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
록 흑돼지를 향한 감정은 시기와 질투로 변했고 알 수 없는 분노까
지 치밀었다. 이에 왕국의 위대한 스케이터이자 흑염소와 흑돼지를
키워낸 에궁선생은 '지금 너에게 필요한 건 라이벌이며 흑돼지는 너
의 실력을 히말라야 꼭대기로 날려 줄 발구름판이 될 것이야'라며
그녀를 위로했다. 하지만 아직 수염조차 채 자라지 못한 어린 흑염
소였기에 그 말은 들릴 리 만무했다. 오직 흑돼지를 완벽하게 눌러
관심과 사랑을 되찾아 올 생각만이 종로3가의 오방떡 속 팥마냥 흑
염소의 머릿속에 가득 차있었다. 완벽에 가까운 흑돼지를 이기기 위
해서는 현역 시절 에궁선생만이 가능했던 전설의 '3단 스크류바'를
익혀야만 했다. 3단 스크류바란 스크류바를 빨며 세바퀴 반을 도는
공중회전 기술로 흑돼지의 '돼지바'보다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고급 기술이다.
애초부터 무리였다. 매일 스크류바를 스무개씩 빨며 돌기에는 흑염
소의 입술은 너무나 얇고 연약했다. 마치 손톱이 얇고 투명해 미안
하다며 투정부리던 가슴 큰 여배우처럼 말이다. 흑염소는 3단 스크
류바를 익히다 입술이 부르트고 갈라졌으며 그 사이로 스며든 색소
로 인해 나날이 붉게 변했다. 메르망퉁의 어린 아이들 사이에 '식인
흑염소'가 등장했다고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은 그 때부터였다. 그
녀의 연습장이 있던 골짜기 빙판에는 사람의 피를 빠는 흑염소가 피
를 뚝뚝 흘리며 붉은 입술로 먹잇감을 찾아 껑충껑충 뛴다고 했다.
자신이 그 식인 흑염소일꺼라고는 꿈에도 생각지도 못했던 흑염소
는 훈련에만 매진했고, 마침내 3단 스크류바를 완성했다. 그리고 결
전의 날이 다가왔다. 온 국민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비비빅을 문
왕의 선포로 빙신일세가 열렸다. 앞서 경기한 흑돼지는 사람들의 많
은 갈채 속에서 돼지바를 완벽하게 구사하며 무사히 연기를 마쳤다.
관중들은 그녀를 위해 빙판을 가득 메울 정도로 오방떡을 던져주었
다. 그리고 마침내 흑염소의 차례가 되었고 그녀는 결의에 찬 눈빛
으로 스크류바를 물고 빙판 가운데 섰다.
"식인 흑염소다!" 누군가 외쳤고, 이내 경기장은 아수라장이 되었
다. 서둘러 아이를 챙겨 경기장 밖으로 도망가는 엄마, 혼비백산 놀
라는 과정에서 떨어뜨린 틀니를 잡으려다 관중에 깔린 노파 등으로
아비규환이었다. 영문도 모른채 흑염소는 연기를 시작하였다. 오직
흑돼지만을 이기겠노라는 그래서 일등이 되겠노라고 다짐에 다짐을
더했다. 무사히 3단 스크류바를 마치고 마무리 스핀동작을 하던 중
흑염소는 자신이 그 식인 흑염소였음을 알아챘다. 누군가 던진 십자
가 때문이었다. 그 때였다. 태어나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현기
증이 그녀를 쓰러뜨린 것은. 그녀는 빙판에 머리를 박으며 피를 흘
린 채 쓰러졌다. 어지러웠다. 그러나 그녀를 더욱 괴롭힌 건 타는 목
마름이었다. 자신이 흘린 피가 너무나도 땡겼다. 흑염소는 그렇게
식인흑염소가 되었다.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 그녀를 식인
흑염소로 만든 것이었다. 지금도 그녀는 메르망퉁의 어느 골짜기에
서 여행객들의 피를 빨며 음습한 삶을 살아간다 한다. 그때부터 메
르망퉁에는 빙신일세 주간은 더 이상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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